허상배 칼럼 “제2편 AI 시대에 인간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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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배 민주사회정책의장
허상배 칼럼 “제2편 AI 시대에 인간의 길을 묻다!”
2026. 9. 8 / 화
부제 :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
지난 1편에서 나는 AI와 로봇이 인간의 많은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AI가 계산하고 검색하며 반복적인 일을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은 기계에게 맡기면 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 강력한 기계를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나는 그 질문에서 도덕과 양심, 정의와 책임, 그리고 인간성 회복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인간의 길을 묻고 싶습니다.
미래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돌아보려 합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나의 할아버지에게서 시작하고 싶습니다.
■ 나는 검은 갓과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를 기억합니다
나는 지금도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할아버지는 외출하실 때 한복을 입고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검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으셨습니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우리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2026년 오늘 나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사용하고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검은 갓과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와 AGI를 이야기하는 손자.
이 두 장면 사이에 수백 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과 몇 세대가 있을 뿐입니다.”
문명이 너무 빠르게 변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잊기 쉬워졌습니다.
할아버지 세대는 조선의 생활문화가 몸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였습니다.
일본식 교육을 받아야 했고 우리 이름마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도록 강요받았습니다.
나는 역사를 편리하게 골라서 기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픈 역사라고 지워서도 안 되고 오늘의 감정에 맞추어 과장해서도 안 됩니다.
“있었던 것은 있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의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 아버지의 열일곱 살과 대판
그다음 세대인 나의 아버지도 식민지 시대를 몸으로 통과했습니다.
아버지는 열일곱 살 무렵 일본 대판, 지금의 오사카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내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히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는 지금 내가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열일곱 살의 젊은이가 고향과 가족을 떠나 낯선 일본 땅에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시대의 무게를 알 수 있습니다.
훗날 내가 어른이 된 뒤에도 아버지는 가끔 대판에 다시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당시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힘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을 굳이 다시 찾아갈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를 모시고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아팠던 시간이 오히려 평생 가장 깊은 기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나는 열일곱 살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미 아버지가 된 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마음 한구석에는 평생 열일곱 살의 소년이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다시 만나고 싶었던 것은 오사카라는 도시가 아니라,
“그곳에 남겨두고 온 열일곱 살의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역사에는 사건이 남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 사건을 살아낸 기억이 남습니다.
“역사가 사건의 기록이라면, 기억은 그 역사를 살아낸 인간의 기록입니다.”
■ 해방 뒤에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5년 뒤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서울이 무너지고 전선은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대한민국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습니다.
경북 칠곡 다부동에서는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던 국군 제1사단을 비롯한 국군과 유엔군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뀌었지만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 전쟁은 군사지도 위의 화살표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와 가족들은 실제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어디에서 잘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내일 가족이 모두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6·25전쟁을 역사책 몇 페이지로 읽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쟁은 몇 줄의 연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살아남는 것 자체가 삶이었습니다.”
■ 전쟁이 끝난 자리에 폐허가 남았습니다
1953년 총성이 멎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고 정상적인 생활이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집이 무너졌습니다.
공장이 파괴되었습니다.
도로와 철도가 망가졌습니다.
전기가 부족했습니다.
일자리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사람에게 국민소득이 몇 달러인가보다 더 절박한 것은 오늘 가족에게 무엇을 먹일 것인가였습니다.
그런 나라가 오늘은 자동차를 만들고 배를 만들며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세계시장에 내놓고 있습니다.
나는 이 변화를 경제성장률이라는 숫자로만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한 세대의 삶이 통째로 산업화의 연료가 된 압축성장이었습니다.”
■ 공장의 불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